반골의 기하학: 메리 헤일만
Geometry in Rebellion: Mary Heil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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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by 존 야우 John Yau
Translation by 박상미 Mimi Park
메리 헤일만이 조각에서 회화로 옮겨간 주된 동력은 그녀의 반골기질 때문이었다고, 많은 비평가들이 평했다. 그녀의 이러한 변화는 1970년, 그러니까 미니멀리즘, 팝아트, 컬러필드 회화의 조류가 한풀 꺾이고 개념주의가 장악하는 10년으로 이어질 무렵에 일어났다. 회화가 종말을 맞을 거라는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이 결정에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헤일만의 결정이 더 치명적이었던 것은 당시만해도 여성 아티스트가 지금보다 훨씬 주목받기 어려웠고, 화가일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 심했기 때문이다.
“반골”이라는 것이 그 전환의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녀가 장르를 바꾸고 나서 어땠는지 그 전부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헤일만의 표현대로 그녀의 “반대 행보” 자체가 전부를 거는 도박을 할 힘, 즉 구식의 미디엄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기에 충분했는가? 내가 보기엔 ‘반대 행보’라는 의뭉스러운 표현으론 그녀가 갖고 있는 자신감이나 결단력, 철저함을 알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회화로 전환한 것이 아니라 회화의 문제들을 정면돌파했고, 그녀가 택한 방법은 계속해서 반향을 일으켰다.
헤일만은 1963년 베이 지역에서 시를 공부하고, 고등학교 때부터 노스 비치의 문단, 시티라이츠 서점을 알았기에 신념을 갖는 것만큼이나 반항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아마도 내가 시인이라서, 시라는 것이 글자와 단어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언어라는 재료가 가진 조건을 한계로 보지 않고, 시인이라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녀가 관심을 가진 시인은 로버트 크릴리와 드니즈 레버토프이다. 헤일만에 대해 에세이를 쓰려니 언젠가 크릴리가 레버토프에 대해 쓴 말이 생각난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눈을 뜬 상태로 꿈을 꾸는 사람, 불굴의 의지로 실질적인 미래의 비전을 가진 사람이다. 열정적이고 재미난 마음이 완고한 의지가 되기로 한 것이다.
헤일만이 “한계”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녀가 한번도 공부한 적이 없는 회화를 하기로 한 결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남부와 북부 캘리포니아에서 자란 그녀는 자유와 반항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지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서핑하고 음악을 듣고 아무 거나 재료로 삼아 미술 작업을 하면서 말이다. 그녀는 버클리 대학 조각과에서 피터 불코스와 짐 멜커트 밑에서 도예를 공부했다. 멜커트가 마련한 LA 현장 학습 여행에서 그녀는 니콜라스 와일더 갤러리에서 열린 브루스 나우만의 파이버글래스 오브제 전시를 보고 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우만은 UC 데이비스에 다니고 있을 때였고, 데이비스는 버클리에서 가까웠다. 헤일만은 나우만을 가르치던 윌리엄 T 와일리의 수업을 듣게 되었고, 두 사람을 모두 알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나우만의 <헨리 무어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1967)와 같은 초기작을 볼 수 있었다. 1968년 그녀는 석사 과정을 마치고 뉴욕으로 향했다.
1960년대 말 뉴욕에서 조각 작업을 하면서 헤일만은 플라이우드, 인조견, 파이버글래스, 콜타르 등 조각에서 잘 사용하지 않던 재료들을 사용했다. 그녀는 그 당시 예술계의 흐름을 타고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도널드 저드의 “구체적 오브제”의 정의에 걸맞는 작업들을 하고 있었다. 시대정신에 맞는 작업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다. 엘리자베스 암스트롱에 따르면 헤일만이 회화로 전환한 데는 계속되는 거절도 한몫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룹전들에서 계속 제외되자 몹시 실망했다. 그녀의 생각에는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마샤 터커와 제임스 몬티가 휘트니 미술관에서 1969년 기획한 <안티 일루전: 과정과 재료> 전에 포함되지 못하자 크게 좌절했다.
헤일만 자신은 조각에서 회화로의 전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개념적이고, 반미학적이고, 땅색을 칠한, 아이러니한 그림들, 쳐다보기 힘든 그런 그림들을 해보기로 한 거예요.
헤일만은 인정을 받지 못해서 실망했지만, 비디오처럼 유행하는 미디엄을 선택하는 대신 회화로 돌아섰다. 더 중요하게는 컬러필드 회화도 버리고, “손을 안 쓰는” 작업도 동시에 거부했다. 도예를 통해서 헤일만은 재료와 직접 접촉하는 방식이 구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웠고, 도예와 조각을 통해 배운 것을 회화의 재료를 다루는 데 적용했다.
그녀는 처음에 “쳐다보기 힘든 아이러니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지만 그 결심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보단 그녀는 자신의 삶을 껴안았다. 7살부터 13살까지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서핑 문화에서 자라난 것, 그 후에 가족과 함께 북부 캘리포니아로 이사가서 시와 도자기를 공부하던 경험을 말이다. 헤일만은 작업에서 두 지역의 문화에서 체험한 것들을, 서프 문화와 음악, 도자기와 채도가 강한 색까지를 모두 포함시켰다.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녀가 한 또 한가지 중요한 일은 형태가 전부라는 기존의 믿음, 그리고 프랭크 스텔라가 그의 “블랙 페인팅”에서 한 것처럼 내용과 주관성은 내버려야 한다는 기존의 믿음을 거부한 것이다. 그녀가 처음에 “구체적 오브제”를 만들면서 저드의 노선을 따랐다면, 이제는 저드의 회화에 대한 생각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회화가 갖는 주된 한계는 사각형의 평면이 벽에 납작하게 걸려있다는 사실이다. 사각형도 형태이고, 이건 명백하게 완전한 형태이다. 이는 그 위나 또는 안에 무엇이 들어가든지 그 구성을 결정하고 또한 제약을 준다. (도널드 저드)
주변에 다른 이들도 모두 반항할 때 함께 반항하는 것과 아무도 맞서지 않을 때 혼자 맞서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다. 헤일만은 “구체적 오브제”를 만들다가 “벽에 납작하게 매달린 사각형 평면”에 그림을 그리는 일로 옮겨갔다. 이 전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헤일만은 테이블 위에 캔버스를 올려놓고 스퀴지와 붓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는데, 물감이 옆으로 흘러내리도록 했고, 흘러내린 물감도 작업의 일부로 여겼다. 이 흔적, 즉 과정의 결과로서의 흔적으로 인해 그녀의 작업은 회화가 되기도 하고 구체적 오브제가 되기도 한다. 동시에 미니멀리즘, 팝아트, 컬러필드 회화로부터 거리를 둔 작가에게 가능성이 열리도록 해준다. 흘러내린 물감은 캔버스의 앞면에서 스퀴지로 밀어낸 것이면서 작품의 일부인데, 옆면을 보면, 회화라는 것이 표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돌이켜보면 헤일만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거부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한 것이 명백해진다. 많은 젊은 작가들에게 그녀가 영웅인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작업들은 4년간 (1975-1978) 아크릴 물감으로, 삼원색(빨강, 노랑, 파랑)으로만 그린 작품들이다. 헤일만은 사각형 평면에 작업하기로 했을 뿐 아니라 피엣 몬드리안이나 바넷 뉴먼 같은 순수 추상작가들이 주로 사용한 원색을 선택했다. 그녀는 황소(또는 모더니즘의 기하학적 추상, 회화나 조각 모두에서)의 뿔을 두 손으로 잡은 것이다.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컬러필드 작가들이 사용했을만한 도구인 스퀴지와 구식 도구인 붓을 모두 사용했다. 그 결과 기하하적 추상이나 추상표현주의적인 형태와는 구분되는, 구불구불한 띠들을 낳았다. 구불구불한 띠는 사각형이라는 형태를 인정하지만, 옆으로 흘러내린 물감의 존재는 사각형의 한계를 뒤집는다.
헤일만은 시작부터 놀랄정도의 단순함으로 순수와 교조주의를 거부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처음에 “반대 행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해서 결국 추상표현주의, 미니멀리즘, 영국의 낭만주의 회화, 그리고 다른 폭넓은 예술가들 즉 존 컨스터블에서 바넷 뉴먼, 조지아 오키프, 앨런 다칸젤로까지 흡수하면서 동시에 재정의하는 방식이 되었다. 이는 동시에 명백하게 메리 헤일만이라는 자신의 그림을 낳는다.
미니멀리즘 조각과 회화와 함께 가는 기하학적 추상을 거부하는 대신 헤일만은 이를 풀어헤쳐 표현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 가능성을 감지했던 것 같다. 아마도 도예를 공부했기에, 그곳에서 형태가 정서로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도자기 작업을 하면서 또 한가지 배운 것은 완벽함이라는 것이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는 자각, 손은 기계 같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과정은 실제로 표현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원색으로 그린 헤일만의 기하학적 형태의 그림들은 “핸드메이드”와 “홈메이드”의 성격이 모두 보인다. 당시 그런 그림은 없었다. 이들은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것이 반드시 객관적이고, 말끔한 가장자리 처리와 단단하고 동일한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것에 반기를 든 것이다. (계속)
Many writers have advanced that the rousing force behind Mary Heilmann’s move from sculpture to painting was her contrariness. She made this move in 1970, during the waning days of Minimalism, Pop Art, and Color Field painting, at the cusp of a decade dominated by Conceptual Art. It was an unlikely direction to go in, because many believed that painting had entered a terminal condition. Heilmann’s move was further stigmatized by the fact that, if women artists were still hardly recognized in the art world, the situation was particularly bad for painters.
While “contrariness” might adequately describe her motivation, it does not account for what happened once she made the switch. Was Heilmann’s “antagonistic move,” as she called it, enough to push her into an all-or-nothing gamble — that something new could be done in a medium that many considered exhausted? As I see it, this rather self-effacing quote does not indicate her confidence, determination, and thoroughness: she did not simply move into painting, she tackled it head-on in ways that continue to reverberate.
As a student who studied poetry in the Bay Area in 1963, and who had been aware of the North Beach literary scene and the City Lights bookstore since she was in high school, Heilmann understood that defiance could be a wager as well as a leap of faith. At least that’s my view, perhaps that’s because I am a poet and recognize that poetry is made of letters and words. Instead of regarding this material condition as a limitation, poets embrace it.
The poets she heard read included Robert Creeley and Denise Levertov. Something Creeley wrote about Levertov came to mind while writing this essay and thinking of Heilmann:
In a sense she was a wide-awake dreamer; a practical visionary with an indomitable will; a passionate, whimsical heart committed to an adamantly determined mind.
I think Heilmann’s relationship to limitation underlies the decision she made to begin painting, something she had never studied. Growing up in both southern and northern California, she had first hand experience of how freedom and rebellion could become manifest, from surfing to music to making art out of any material. As a student working in the sculpture department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she studied ceramics with Peter Voulkos and Jim Melchert. On a school trip to Los Angeles, organized by Melchert, she saw Bruce Nauman’s fiberglass objects at Nicholas Wilder, and decided to meet him. At the time, Nauman was still a student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Davis, which is a short distance from Berkeley. Heilman took a tutorial with William T. Wiley, Nauman’s teacher, and got to know both men. She saw early works by Nauman, such as Henry Moore Bound to Fail (1967). In 1968, after finishing her graduate requirements, she moved to New York City.
Working as a sculptor in New York in the late 1960s, Heilmann used such non-art materials as plywood, rayon flocking, fiberglass, and roofing tar. She rightly felt that she was in touch with what was going on at the time, and, in fact, her work met the expectations set up by Donald Judd’s definition of a “specific object”: it need only be interesting. Making work that fit in, that was of its time, however, did not seem to gain her any recognition. According to Elizabeth Armstrong, Heilmann’s move towards painting was precipitated by repeated rejections:
She was extremely disappointed that her work was not selected
for several group exhibitions that, in her estimation, captured the zeitgeist, and her exclusion from Anti-Illusion: Procedures/Materials, an exhibition organized by Marcia Tucker and James Monte at the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in 1969, was especially devastating.
This is how Heilmann described the switch from sculpture to painting:
What I turned to was a materials-based sort of conceptual, anti-aesthetic, earth-colored, ironic painting that was hard to look at.
Heilmann may have been disappointed by the lack of reception, but, instead of choosing to work in a more fashionable medium, such as video, she turned to painting. More importantly, she rejected both Color Field painting and the idea of taking the hand out of art. As a student of ceramics, Heilmann learned that direct contact with one’s materials is not old-fashioned. Instead, she took the lessons she learned from studying ceramics and from making sculpture and transformed them into a direct engagement with painting. And yet, while she may have initially made “ironic painting that was hard to look at,” she did not maintain this attitude for very long. Rather, she embraced her own life, which included growing up in the surfing culture of Southern California from the age of 7 to 13, and moving with her family to Northern California, where she listened to poets and studied ceramics. In her work, Heilmann embraced aspects of both scenes, from surf culture, to highways and music, to ceramics and saturated color.
By welcoming her own life, the other crucial thing she did was reject the received belief that form (or objectivity) was all, and that content and subjectivity (along with space) had to be squeezed out, as Frank Stella had done in his “black” paintings. Instead of conforming to the rules – as she was arguably doing with her “specific objects” – she essentially challenged head-on Judd’s pronouncement on painting:
The main thing wrong with painting is that it is a rectangular plane placed flat against the wall. A rectangle is a shape itself; it is obviously the whole shape; it determines and limits the arrangement of whatever is on or inside of it. (Judd)
It is one thing to be rebellious when everyone around you is, and a very different matter to be insubordinate in an area where almost no else is. Heilmann went from making “specific objects” to applying paint to “a rectangular plane placed flat against the wall.” This move was not as straightforward as one might expect.
By using a squeegee and a brush, and working on a stretched painting that was placed on a table, Heilmann chose to let the paint that dripped over the sides remain as part of the work. This residue, which is the result of a process, made the work into both a painting and a specific object, as well as opened up a space for the artist that stood apart from Minimalism, Pop Art, and Color Field painting. The residue was the stuff the squeegee pushed off the painting’s face but was still part of the work, if you looked at the sides, which meant the painting was just a surface to be looked at. In retrospect, it is apparent that Heilmann began her career by refusing to do what was expected of her. No wonder she has been a hero to so many younger artists.
The paintings in this exhibition were done in acrylic over a four-year period (1975-78) in colors limited to the primaries (red, yellow, and blue). So not only did Heilmann choose to paint on a rectangular plane, she picked the colors associated with purist abstraction, those of Piet Mondrian and Barnett Newman. She took the bull (or modernist geometric abstraction, in both painting and in sculpture) by the horns. Nor she did she stop there: she used both a squeegee – an instrument associated with Color Field painting – and a brush (an old fashioned instrument) to apply her paint, resulting in wobbly bands that undermined the orthodoxies associated with geometric abstraction and post-painterly practice. The wobbly bands acknowledged the rectangle’s shape, while the paint dripping down the painting’s sides subverted the rectangle’s limitations.
Refusing to be hemmed in, Heilmann rejected purity and orthodoxy from the outset with breathtaking economy. This approach might have initially been “an antagonistic move,” but it has changed over time to become a way to absorb and remake Abstract Expressionism, Minimalism, and English Romantic painting, along with the work of a wide range of artists, from John Constable to Barnett Newman, Georgia O’Keeffe to Allan D’Arcangelo, all while making what is clearly a Mary Heilmann painting.
Instead of rejecting geometric abstraction, the bread-and-butter of Minimalist sculpture and painting, Heilmann unzipped it, showing that it could become expressive. She seems to have intuited this possibility from the beginning, perhaps because of her background in ceramics, where forms could be imbued with feeling. The other thing that she might have gotten from working in clay is the realization that perfection is not always desirable; the hand does not have to become machine-like. The process of making them could, in fact, be expressive. Done in primary colors, Heilmann’s geometric paintings come across as both handmade and homemade. Nothing like them was being made at the time. They pushed back against the conventions associated with geometric abstraction – objectivity, crisp edges, rigid forms, and uniformity.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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