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pped and Joined: Jasper Johns' Hidden Motif
조각난 신체: 재스퍼 존스의 보이지 않는 모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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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by John Yau 존 야우
Translation by Mimi Park 박상미
나는 오하라가 한 이 관찰이 존스가 로버타 번스타인에게 했던 말, 그의 초기 작업 "석고상이 있는 타겟" 그리고 "네 개의 얼굴이 있는 타켓"(모두 1955) 에 등장하는 석고 작업에 대해 그가 한 말이 연관된다고 생각했다.
"조각난 인간의 신체를 형상화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감동적이에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감정이 불편해지거나 격해지거나 하죠. 아마도 보는 사람 자신의 신체 이미지에 심난한 영향을 주기 때문인 것 같아요.
레오 카스텔리에서 했던 첫번째 전시(1958년 1월)와 매튜 막스에서의 최근 전시(2019년 2월 9일-4월 6일)까지, 존스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소재는 잘라지거나 손상된 신체였다.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는 잘라진 신체, 손상된 피부와 신체 일부의 흔적, 관객들은 눈치만 챌 정도의 슬픔, 그리고 마치 우리를 기다린다는 듯이 문 앞에서 멋진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서서 웃고 있는 해골 등을 다양한 재료와 작업 과정으로 기록해왔다.
존스의 작업 방식 중 한가지는 하나의 이미지를 베낀 후, 그 윤곽선을 유지하면서 이미지를 변형하는 방법이다. 그가 원래 이미지를 변형시키는 방법은 그가 스케치북에 적어놓았던 유명한 말 "뭔가 하나를 골라서, 거기에 뭔가를 하고, 또 다른 뭔가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복하라]"
그의 초기 작업 중에 이러한 예로 "흰 국기(1995)"가 있다. 여기서 그는 종이와 천으로 콜라주해서 만든 바탕 위에 흰 왁스로 미국의 국기를 그려 무색의, 시체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왜 국기가 색깔을 잃고, 마치 장례식처럼, 또는 항복할 때 드는 백기처럼 된 것일까?
존스가 기성품, 즉 종종 "레디메이드"라 불리는 소재를 택한 후 반복적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은 앤디 워홀이나 그 추종자들이 하는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이들은 한가지 소재를 택한 후 거기에 한가지만 한다. 존스가 레디메이드를 변형시키는 방법은 대량 생산이나 작업실 조수가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니다. 그의 작업은 변주가 아니다.
존스가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모티브들은 에드바르드 뭉크, 파블로 피카소, 마르셀 뒤샹과 같은 현대 미술가들과 한스 홀바인이나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와 같은 북부 르네상스 작가들에서 왔는데, 그런 이유로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워홀은 종종 민주적인 작가라고, 존스는 엘리트주의라는 평을 듣는데, 두 경우 모두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게다가 존스는 뭔지 알 수 없다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관객들은 종종 그 "신비롭고"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고통"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들의 출처도 알 수 없고, 이들이 고통에 관한 것이라면 누구 탓을 해야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존스의 모티브 중에 그 원천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다. "초록 천사(캔버스에 왁스와 모래, 73 1/8 x 50 ¼, 1990)"에서 처음 사용한 모티브인데 이는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에서 했던 전시 <재스퍼 존스> (1991년 2월 16일- 3월 9일)에서 처음 전시되었다. 전시 포스터에 이 그림 "초록 천사"가 사용되었다.
모티브는 두 형상이 합쳐진 모습인데 하나는 수직이고 다른 하나는 수평이다. 둘 다 뭔지 확실히 가늠하기가 힘들다. 수직의 형상은 화면의 끝쪽에서 올라오는데, 형상의 밑부분은 나머지 형상에 비해 좀 좁아보인다. 형상의 하단은 파랑, 주황, 빨강, 노랑, 보라색이 평평하게 교차하며 섞인 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수평으로 놓인 형상은 베이지의 회벽 색이고, 마치 수의에 쌓인 것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다. 가늘고 얇은, 불규칙한 V자처럼 생긴 선이 어깨처럼 보이는 곳 근처에서 형상을 가로지른다. 이 선은 머리와 몸을 구분하는 듯하다. 짤막한 부분이 왼쪽 아래에 튀어나와 있는데, 수직의 형상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둥그렇고 빨간 부분을 잡고 있는 듯하다.
"초록 천사"에서 존스는 이 새로운 모티프를 "무제" (oil on canvas, 22 5/8 by 16 1/2 inches, 1985)에서 처음 사용했던 모티브- 긴 눈썹이 달린 두 개의 눈알-과 함께 사용한다. 그 두 개 중 하나가 이 그림의 왼쪽 상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다른 하나는 오른쪽 하단, 가장자리에서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다.
존스는 이렇게 도식적으로 그린 얼굴과 추상적인 형상의 조합을 초록색 배경 위에 놓았다. 도식적인 얼굴은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형상의 조합을 들여다보고 있다. 가장 쉽게 연상되는 이미지는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인데, 이 연상은 시작부터 문제가 있다. 수직의 형상은 여자의 몸 같지 않고, 특히 마돈나나 엄마 같지 않고, 수평의 형체는 아기라고 보기엔 너무 크다. 수평으로 누워있는 형상은 살아있을까 죽은 걸까?
"초록 천사"와 그와 관계있는 작품들을 처음 본 후, 나는 존스가 번스타인에 한 말, 사람들이 "조각난 인간의 신체를 형상화하는 것"에 "감동을 받는다"든가, "감정이 불편해진다"든가 하는 말을 떠올렸다. 종종 냉담하고, 무심하고, 지나치게 지적이고, 무뚝뚝한 사람이라 여겨지는 존스가 그런 말을 한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존스는 예술가가 예민하고 괴로워하는 존재라는 클리셰적인 생각을 거부하듯 세상과 거리를 두어왔는데 말이다.
동시에 나는 이 이미지의 원천에 대해 궁금했는데, 그가 1990년에서 97년 사이에 완성한 13편의 작품에서 이 이미지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모마의 웹사이트에는 모마에 소장되어 있는 "초록 천사2"의 판화 작업에 대해 이렇게 적혀있다.
"존스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 따온 모티브와 패턴을 자신의 작업의 구성 요소로 사용해왔다. 그가 사용한 레퍼런스 중 상당부분은 확인이 됐는데,-현대의 거장 파블로 피카고에서 르네상스의 마티아스 그뤼네발트까지- 이 작품에서 존스는 이름 모를 작업에서 따온 형상을 사용했다. 그는 이미지가 어디서 왔는지 밝히지 않는데, 관객들의 즉각적인 반응에 방해를 줄까봐서이다. 지금껏 "초록 천사"의 모티브는 모두 40여 개의 회화, 드로잉, 판화 작업에 사용되었다."
우리가 모티브의 원천에 대해 알게 되면 이미지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게 될까? 존스가 자신에 대한 무언가 밝혀질까봐 뭔가를 숨긴다는 생각을 확인하게 되는 걸까(나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초록 천사"의 모티브를 엄마와 아이라는 익숙한 이미지가 연상되기 때문에 선택한 걸까? 만약 형상이 "초록 천사"가 아니라면 도식화된 얼굴이 천사일까? 우리의 연민의 능력은 어디까지일까? 특히 제도화된 끔찍한 폭력이 난무하고, 인간 학대가 신고되지 않은 채로 지속되는 이 세상에서 말이다.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반응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이런 질문들을 다시 하게 된 이유는 오늘, 내가 안면이 없는 한 아티스트, 크리스토발 레히트에게서 이메일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이메일이 잘 들어가길 바랍니다.
제가 메일을 쓰는 이유는 선생님이 관심을 가지실만한 이미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너무 늦게 이 메일을 드리는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보지 못하셨다면 아마 관심을 가지시리라 생각됩니다.
여기 흑백의 이미지는 오귀스트 로댕의 "여자 켄타우로스 토르소와 미노타우르"라는 작품으로 프랑스의 므동에 있는 로댕 박물관에 있는 작업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존스가 이 모티브를 작업에 "초록 천사"로 사용한지 10년 후에, 브루노 라투르와 피터 위벨이 편집한 Iconoclash: Beyond the Image Wars in Science, Religion and Art 라는 책 속에 흑백 사진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다리오 감보니의 <왜 이미지들은 그렇게 애매한가>라는 챕터에서 로댕의 이 작품과 존스의 "사람에게 물린 그림(1961)"이 41페이지의 간격을 두고 함께 소개되었습니다.
나는 재스퍼 존스에게 이메일로 로댕 작품의 이미지를 이런 메시지와 함께 보냈다. "이 작품을 보는 순간 선생님을 생각했습니다." 존스의 대답은 더 짧았다. "아마도 그랬겠지요!"
그리스 신화 속에서 미노타우르와 켄타우로스는 반대다. 미노타우르는 황소의 머리와 사람의 머리를 가진 야수이고, 켄타우로스는 사람의 머리와 몸통, 그리고 말의 하체를 가졌다.
로댕의 조각에서 어두운 색의 미노타우르가 여자 켄타우로스의 토르소를 안고 있다. 토르소는 동물의 하체로부터 잘라진 것이고, 그 토르소는 미노타우르의 팔 위에 놓여있다. 그의 하얀 손들이 그녀의 몸 밖으로 나와있고, 손가락은 안으로 접혀있다.
머리가 뒤로 젖혀진 여자 켄타우로스의 잘라진 토르소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상상하기 힘든 존재들의 조합은 에로틱한가, 폭력적인가, 비극적인가, 아니면 슬픈 것인가? 이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켄타우로스와 미노타우르 모두 알 수 없는 대재앙의 희생물 같아 보인다.
존스는 이 두 존재의 불가능한 관계가 주는 고통을 관객에게 좀 더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 이미지의 근원을 감춘 것일까? 아니면 합쳐져 있지만 서로 맞을 수 없는 이 두 개의 형상에 그저 집중하기 위해서 였을까?
"초록 천사" 속 두 눈은 합쳐지긴 했지만 맞지 않는 부분이 만난 존재로서의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합쳐지긴 했지만 본래 형상에선 분리된, 의존적인 형상을 보고 있는 것일까? 왜 누워있는 형상은 무채색이고 수직의 형상은 여러가지 색으로 되어있을까? 이 그림은 우리가 누군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그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이 이미지가 왜, 어떻게 그를 심난하게 만들었을까? 불편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상태 자체가 피할 수 없는 조건은 아닐까? 이런 질문들에 요점이 있어야 하는 걸까? 존스는 우리가 "다가가지" 못한 채로 보고 있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존 키이츠가 "사실과 이성에 따르는" 것을 경고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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